어떤 나무들은
참 신기한 일이었다. 내가 태어나던 해에, 결코 잘 안다고 말할 수는 없는 시인이, 난생 처음 가보는 먼 나라에서 적어내린 일기장의 면면이 이런 기분을 들게 한다는 게.
🔖 그래서 내가 나는 무엇을 위해서 쓰지는 않는다, 내가 쓴 것이 무슨 ‘이즘’이나 무슨 이데올로기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좋은 이즘이나 이데올로기라면 내 시를 이용하는 것은 양해할 수 있지만 내게 무슨 이즘이나 이데올로기를 위해서 쓰라고 한다면 나는 쓰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다.
🔖 이상하게도 나는 아이오와에서 단 한 편의 시도, 아니 단 한 줄의 시구도 얻지 못했다. 모든 게 너무 다르기 때문에 내 감수성이 문 꽉 닫아버리고 있는 걸까. 그렇긴 하지만 안타깝지는 않다. 내가 체험하는 것들 모두가 착실하게 내 내부로 가라앉고 있을 거다. 그리고 어느 날 시로 나오겠지.
🔖 나는 왜 쓰지도 않고 나는 무엇을 쓰지도 않는다. 나는 나를 쓸 뿐이다. 그게 왜가 되고 무엇이 된다면 좋고, 안 돼도 할 수 없다. 아무튼 이런 질문들은 나를 귀찮게 만든다. 내가 원고에서 쓴 요지는 나는 이런 질문을 이미 살아 넘긴suvive 한 사람이다, 한국에서도 이미 이런 질문을 넌더리나게 들어왔는데 왜 여기서도 내가 이런 질문에 마주쳐야 하는가로 시작해서, 나의 체험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내가 쓰고 싶어서 쓸 때 거기에 이미 왜와 무엇이 다 포함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 무슨 일이든지, 무슨 분야든지, 시 쓰는 일, 번역하는 일, 하다못해 삯바느질하는 일에서까지도 결국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생각된다. 자기를 속이지 않기 위해서, 자기에게 속아넘어가지 않기 위해서 자기 자신과 싸우는 것.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이, 어쩌면 작가들은 더 많이, 외부로만 자신을 투사할 뿐 내부로 자신을 투사하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행복한 삶이다. 공연히 사서 고생할 필요가 없으니까.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면서 함께 대열을 이루어 따라갈 수 있다면 얼마나 편안한 삶이겠는가.
🔖 이 사람들은 항상 나로부터 전체로 나아가고,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으로 나아간다. 우리와는 반대이다. 내 시의 영어 번역에서도 그런 점이 드러났는데 내 시점은 항상 큰 것으로부터 나를 향해 좁아져 들어오는데 비해, 내가 영역한 시를 읽고서 자기 나름대로 번안한 한 학생의 시를 읽어보면 그는 시점을 완전히 뒤집어버려서 자기 자신이 처해 있는 지점으로부터 자기 외부로 확대되어나가도록 만들어놓았다.
🔖 그건 내가 무의식적・집단적으로 프로그램화된 사회에 살고 있었고 그런 사회에서 잠시나마 다른 사회로 이식되었을 때 나의 온몸의 세포들이 느꼈던 어떤 본능적인 공황 감각, 말하자면 난생처음 겪는 현상들에 대한 공포감, 거부감을 느꼈지만, 그러나 점차로 내 몸의 세포들이 그 이식된 사회에 적응해가면서 그 공포감, 거부감은 천천히 바스러 져나갔고, 이제는 다른 공포감과 거부감, 즉 이 이식된 현실에 적응해가면서 새로 뿌리내리게 된 것들 때문에 완전히 옛것들을 잊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감정과 동시에 그 옛것들에게로 다시 돌아가기 싫다는 혹은 그것과 다시 마주쳐야 한다는 강한 두려움의 감정 때문에 생겨난 증세였다는 거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과거의 것들을 되돌아보게 된, 그러니까 이미 나의 것이 아니게 된 것들을 객관적으로 되돌아보았을 때의, 그러니까 사후의 추체험을 통해 다시 느껴보려 할 때의 공포감, 아 내가 그런 사회 속에서 살았었구나(그 안에서 살 때는 오히려 그걸 느끼지 않았었는데)하는 공포감과, 이제 다시는 그것을 몰랐을 때의 상황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그리고 되돌아간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는 공포감을 내 세포들이 느꼈고 그 세포들의 집합인 내 육체가 그 증세를 앓았고, 그 두려움의 감정을 내 세포들은 내 무의식에 부지런히 타전했고, 내 무의식은 그 것들을 하나씩 접수하면서 아직 명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불안감을 느꼈고, 내 무의식은 그것을 부지런히 내 의식에 타전했고, 내 세포들과 내 무의식이 타전해준 그 정보들을, 그 감정들을 하나씩 접수하여 차곡차곡 쌓아놓았다가, 오늘 새벽 내가 깨어났을 때 내 의식이 드디어 하나의 완벽한 문장으로 만들어내게 제시한 거다. 그리고 그 문장은 바로 이렇다."나는 프로그램화된 사회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그 문장의 배경을 이루는 감정은 이런 거다. 나는 이 프로그래밍에 더이상 적응하지 않겠다. 나는 더이상 프로그램화되지 않겠다.
그것을 이제 나는 내 의식으로써 분명하게 의식화했다. 이건 하나의 입문이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혼자서 배우는, 독학이 체질인 사람이니까, 이렇게 입문한 이상 나는 아마 나 혼자 힘으로 이 방향으로 배워나갈 것이다. 그것을 지금 나는 확신한다. 생각해보면 언제든 어느 문턱까지만 인도받으면, 그다음부터는 나는 나 혼자서 배워왔다. 제도, 기관 같은 것은 언제나 따분했다.
나는 언제나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해왔다. 나는 언제나 내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생각해왔다. 나는 내가 다 늙어서 이제 아무것도 시작할 수가 없다고 생각해왔다. 무엇을 시작하기에도 너무 늦었다고 생각해왔다. 나는 현재가 감옥이라고 생각했고, 미래도 닫힌, 출구 없는 감옥이라고 생각했고, 나는 시간이 감옥이라고 생각해왔다. 그것은 내가 무의식적・집단적으로 프로그램화된, 그렇게 보도록 짜여진 사회에서 살았기 때문에, 역사, 전통, 계급, 통념, 상식, 권력, 학교가 그렇게 보도록 프로그램화시킨, 그리하여 내 세포들의 유전자와 내 감수성과 내 사고력에 내가 일생토록 그렇게 보고, 그렇게 느끼고, 그렇게 생각하도록 프로그램화시킨 것에 충실히 순응했기 때문에(라기보다는 내가 거기에 과잉반응을 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였다. 이제 나는 그 프로그램을 벗어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 나는 더이상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게 내가 얻은 가장 큰 소득이다. 내가 나를 불행하다고 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내게 강요되었던 가치관의 정체를 내가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고, 그런 가치관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내가 나를 불행하다고 보지 않을 때, 내가 현재를, 미래를, 시간을 더이상 감옥으로 보지 않게 될 때 나는 어떤 가능성의 입구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이제는 거꾸로의 과정이 진행될 것이다. 내 세포가 내 무의식에게 내 무의식이 내 의식에게 상향 전달하는 과정의 반대 과정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제 내가 분명하게 내 의식으로 의식하게 되었으므로, 나는 내 의식으로 내 무의식에게, 나의 감수성과 나의 사고 방식에게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내 세포들에게 하향 전달할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너희들이 느꼈던 게 옳다고, 계속 그 방향으로 나아가라고. 마침내 그것들이 스스로 확신을 가질 수 있을 때까지.